대덕넷에 게재된 조필제회장님
번호 67 작성일 2014-09-12 오후 7:40:00
작성자 조각래 전자우편   첨부 조선 1세대 산업화 초석 다진.hwp(232448)
부친함자 연락처
함안조씨 대문중부터 우리 절도공,첨정공,염수재 문중까지 곳곳에 
관심과 지원을 아끼지 않으시고 계시는 우리 재실의 어른이신 조필제회장님을 과학
및 산업 인터냇 언론인 대덕넷에서 심층 취재하셨네요.
우리 모두에게 귀감이 되는 모습을 꾸준히 보여 주신 조회장님을 언론에서 
공식적으로 언급한 내용입니다.
읽어 보시고 우리 재실에 훌륭하신 어른이 계심에 자부심을 느끼시며, 아울러 감명 
받으시기 바랍니다.

기사 내용

조선 1세대 산업화 초석 다진 '조필제 회장'
"삼면이 바다인 한국, 조선업이 꼭 필요했다"제일모직·제일제당·전주제지·동서식
품 등 공장설립…'국내외 최고'기업으로
김지영 기자 2014.09.01 orghs12345@hellodd.com 

▲ 조필제 세양주택 회장은 서울대 공과대학 조선공학부 1회 졸업생으로 오늘날 세
계 일등 선박국 초석을 마련했다.<사진=김지영 기자> 
"반도인 우리나라에 필요한 것은 조선(造船)이라고 생각했다. 문교부에 조선과 신설
을 요청했고 서울공대에 첫 조선과가 생겼다. 전문과목을 가르칠 선생님이 없어 원서
로 공부하고 학생끼리 질문을 던지며 공부했다. 우린 스스로가 선생과 학생이 돼 윤
강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조필제 세양주택 회장은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조선공학부 1회 졸업생이다. 국내유일 
조선회사였던 대한조선공사에 입사해 국내 최초 철강선 '한양호'를 담당해 준공했
고, 대학에서 후배들에게 선박 건조과정을 강의해 오늘날 세계 일등 선박국 초석을 
마련했다.
부득이한 사정으로 조선업계를 떠날 수밖에 없었지만 조선을 향한 열정은 제일모직, 
제일제당, 새한제지 등 공장 건립 과정에서 발휘돼 산업초석을 다졌다.
올해 만 89세. 경영 일선에서 물러 난 후부터는 고향 함안의 선대 유적을 복원하고 
그 기록들을 책으로 정리하는데 힘쓰고 있다. 또 고향 함안군과 서울대학에 장학금
을 위탁하는 등 후학양성에도 지원을 아까지 않는다.
하고 싶은 것도, 후배들을 위해 남기고 싶은 것도 많은 덕분에 늘 에너지가 넘치는 
조필제 회장을 직접 만나봤다.
◆ 뽕나무 열매 따먹던 소년, 서울 상경해 조선학과 만들다
조 회장은 3남 2녀 중 2남으로 경남 함안에서 태어났다. 초등학교 4학년까지 함안에
서 공부했는데, 전기와 수도 없는 마을에서 함께 크고 자란 사촌들과 5km를 걸어 통
학했다.
방과 후 집으로 돌아오는 길 그는 사촌들과 개천에서 목욕도하고 몰래 고구마도 먹
고, 열매를 따먹으러 뽕나무 밭에 가는 등 집에 곧장 오는 일이 없었다. 공부보다는 
친구들과 놀 때가 많았다. 
일제치하에서 학교 공부를 반대하던 조부모가 돌아가시자 교육열이 강했던 부친은 
곧 상경해 가회동에 보금자리를 마련했다. 부친은 함안에서 지주로서 생활한터라 서
울에 직업이나 연고가 없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부친의 교육열은 남다른 것이었다.
서울은 함안과 달리 학교가 집에서 가까웠다. 오고가는 길에 놀거리가 없어 조 회장
은 집에 와 책을 읽으며 독서에 취미를 붙였다. 공부에 재미를 갖기 시작한 때도 이 
즈음이다.
경기중학교에 입학한 그는 문학과 철학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진
로를 정할 때 고민이 많았다. 그런 그에게 부친은 장래 생활을 보장하기 위해서는 기
술을 익혀야 하니 공과로 진학하기를 권했고 그 뜻을 따라 공학을 전공하게 됐다.
일본기리후고등공업학교 기계공학과에 입학해 유학하고 있던 중 태평양 전쟁이 일어
나 2학년 때 학도 동원령에 의해 나가시마 비행기 주식 회사 군수공장에 파견되어 당
시 전투기 '쇼기'를 조립했다. 
해방과 더불어 귀국 한 그는 서울대 기계과에 입학했다. 대학 생활은 만족스러웠지
만 2학년 말, 조선공학과 신설과 동시에 학우 5명과 '조선공학'을 공부하기로 뜻을 
모았다. 조선과를 만들긴 했지만 문제는 조선 전문 과목을 가르칠 선생이 없었다. 수
소문 끝에 경성제국대 기계과 출신으로 전쟁 중 인천기계 제작소에서 잠수함 건조에 
참여했던 김재근 선생을 모실 수 있었다. 조선에서 필요한 기계분야는 기계과 선생에
게 공통으로 배웠다.
이에 조 회장과 친구들은 외국 원서를 구입해 각장을 나눠 공부해 한 사람이 강의하
고 다른 사람들은 듣고, 질문하며 공부했다. 자신들이 선생이 되고 학생이 된 것이
다. 공부에 재미를 부처 휴일도, 방학도 쉬는 날이 별로 없었다.
조회장은 방학 중 장래에 영어가 꼭 필요할 것이라 예견, 서울에 하나밖에 없는 영어
학원(E.L.I)에 다녀 회화를 익혔는데 뒤에 평생을 통한 직장 생활에 큰 도움이 되었
다.

▲ 서울공대 제1회 조선과 졸업생들. 김재근교수 '배의역사' 출판기념회 조선공학과 
동창회장 모습. (밑에서 맨 오른쪽 조필제 회장)<사진=조필제 회장 제공> 
◆ "조선계 자부심으로 살았지만…처자식 굶길 수 없었다"
서울대 조선과 1회 졸업생으로 졸업한 그와 친구들은 부산 대한조선공사에서 러브콜
을 받아 6.25사변이 나던 해 5월 조선공사에 임직했다. 어디를 가든 현장경험은 있어
야겠다고 생각했던 그는 친구들과 부산으로 내려갔지만 친구들은 대학 교수가 되거
나 미국으로 건너가 박사학위를 취득해 연구 활동을 하는 등 각자의 길을 걷기 시작
했다. 그럼에도 그는 현장을 통해 한국의 조선업을 일으켜야겠다는 신념 하나로 부산
에 남아 계속 근무했다.
맨 처음 그는 평사원으로 입사해 업무를 수행했다. 선반 볼반 등 기계공작은 물론 용
접, 도장 등을 직접 실습했다. 현장 실습 작업을 하는 동안 현장 종업원들은 조 회장
과 친구들이 상사가 될 사람들이라 의미 없다고 생각했는지 크게 달가워하지 않았다.
"내가 현장 일을 배우고 익히려면 현장 종업원들과 인간관계가 좋아져야 할 것 같아 
일찍 나가 청소도 해놓고, 담배도 권하고 퇴근 후 막걸리도 같이 마셨다. 담배를 권
한 후 그 사이에 내가직접 기계도 돌려 제품을 만들고 하였다."
조선이란 많은 종류의 공업이 집대성된 것이기 때문에 세밀한 계획과 체계적이고, 능
률적인 작업원 배치가 필요하다. 많은 인원이 동원되어 긴시간을 요하는 작업인 것이
다. 그는 "오랜 작업 끝에 건조가 완료되어 한양호가 출항의 기적을 울리며 물살을 
가를 때의 그 모습은 아직도 잊을 수 없다"고 회상했다.
그는 6.25 사변 중 한미 해군함정과 민간선박 수리에도 투입됐다. 영어를 하는 사람
이 없어 자연스럽게 그가 미군의 배 수리는 전담하게 되었다.

▲ 대한조선공사 조선담당기사들. <사진=조필제 회장> 
전쟁 중 해군함정 수리 시간을 다툴 때가 많아 이틀 동안 한 숨도 못잘 때도 있었
고, 머리카락에 얼마나 많은 기름때가 묻었는지 집에 가서 앉아 기대는 벽에는 검은 
때로 새카맣게 묻어 가족에게 자주 지적도 당했다. 그러나 좋아하는 일을 하는 만큼 
몸이 피곤한 줄도 몰랐다. 
근무 중 문제가 생겼는데 월급이 2~3개월씩 밀렸다. 조 회장은 회사에서 주는 점심
을 우동으로 때웠지만 부인과 아이 둘은 점심을 굶는 날이 많았다. 겨울엔 연료 살돈
이 없어 냉방에서 잠을 자기도 했다. 대한민국 조선의 일꾼이 되는 일은 생각보다 쉽
지 않았다.
그는 이 생활의 어려움을 듣고 있던 장인어른에게 한통의 편지를 받는다. 삼성에서 
제일모직 공장을 계획하는데 그곳으로 전직하라는 것. 조선업계에 대한 자존심과 자
부심을 갖고 살아왔기에 그는 몇 달 동안 장인어른의 편지에 답장을 안 했지만 나중
에 꾸중을 듣고 가족을 생각해 그곳으로 가기로 결정했다.
◆ 제일모직에서 한국 최초로 소모방정 공장을 건성하다.
당시 이병철 삼성 회장이 대구에 과수원 땅을 매입해 공장 부지를 만들고 소모방직 
시설 발주를 준비 중에 있었다.
조 회장은 독일에 파견되어 (약 8개월간) 각종 발주된 기계 공장에서 기계를 점검하
고 모방직공장에서 생산 공정을 실습하고, 대학교수에게서 방직 기술이론을 습득했
다. 연수 후 귀국한 그는 독일의 각 부분별 전문 조립공 지휘 하에 국내면방직 공장 
경력 기능공을 채용해 기계조립을 시작했다. 독일 사람들은 "기계를 설치하고 시운영
하는데 3년이 걸릴 것"이라고 했지만 조 회장은 1년 만에 기계 설치를 마쳤다.
"독일 조립공은 하루 8시간만 일했다. 하루라도 빨리 생산 제품 생산을 해야 하기에 
우리는 야간작업도 계속 했다. 우리가 밤새 해놓으면 '너희들끼리 해놨으니, 기계 조
립에 책임을 못 지겠다'고 했지만 그 책임은 내가 지겠으니 걱정 말라 하면서 기계조
립을 주야로 계속 서둘렀었다. 그렇게 1년 만에 기계설치가 완료됐다."
제일모직은 조업을 시작한 이후 영업이 잘됐다. 5000추로 시작한 공장은 곧 1만추
로, 1만5천추로 해를 거듭할수록 시설을 확장하였다.
제일모직의 생산이 시작된 후에 소비자들은 저렴하게 양복을 살 수 있었고, 좋은 품
질 덕에 수출도 꾸준히 상승했다. 특히 조 회장은 아세아생산성본부(APO)주최로 개최
된 '세계규격표준화와 품질관리 시찰단'(1963.2.17~4.12)의 한국대표로 참가해 미국
과 일본, 영국, 프랑스, 독일 등 선진국 현황을 시찰하고 귀국해 발전된 품질관리를 
체계적으로 적용, 제일모직제품 품질향상에도 기여하며 한국 KS마크 1호로 지정받기
도 했다.
그렇게 10년을 근무하면서 조 회장은 사원에서 과장, 부장, 상무이사, 공장장까지 승
진에 승진을 거듭했다.
제일모직에서 10년째 근무를 하던 그에게 새한제지(현 한솔제지,전주제지)로 발령이 
내렸다. 당시 전주에는 4.19 후 처음으로 공업단지가 조성돼 신문용지와 교과서 용지
를 생산하기 위한 프로젝트가 제1호로 진행 중이었으나 자금난으로 중단상태였다. 이
를 삼성이 인수받았던 것이다.
조 회장은 한솔제지의 전무이사로 전보되어 F.N.C.B 외화차관, 기계선정, 발주, 설치
작업등을 담당하며 당시로서는 한국 최신, 최대용량의 제지생산 공장을 건설했다. 이
후 한솔제지가 한국제지업계를 대표하며 세계 유수 제지기업으로 발전하는 기틀을 마
련했다.
◆ 사치품 '커피' 일반 시장에 내놓는 기틀 마련

▲ 동서식품주식회사 한미합작투자 조인식. <사진=조필제 회장> 
한솔제지의 기틀을 닦은 그는 제일제당으로 자리를 옮겨 부산(제분), 김포(조미료), 
인천(제당)등 3개 공장의 관리와 기획을 담당했다. 이어 한-미 합작투자 동서식품의 
한국 측 투자부분에 참여해 대표이사 부사장으로 취임했다.
그는 동서식품에서 프리마 생산 공장설립과 냉동커피 기술 도입, 시험연구소 설립 등
을 통해 사치품으로 불리던 커피를 저렴한 가격에 소비자들이 즐길 수 있도록 했다.
당시 우리나라에는 프리마 개발 기술이 없었다. 이에 일본 프리마 공장에서 퇴직한 
기술자를 붙들고 조필제 회장이 밤새도록 설득해 기술을 전수받을 수 있었다. 냉동커
피 기술도 조 회장을 비롯 동서식품 주역들이 직접 뉴욕으로 건너가 기술협약을 맺
어 얻어낸 결과였으며, 파일럿 플랜트 (pilot plant)를 포함한 시험연구소 확립 역
시 미국의 박사진을 영입해 최고의 대우와 최신 기계를 들여 연구할 수 있도록 지원
한 성과였다.
연구소에서 여러 가지의 시험 생산을 함으로서 생산기술이 다방면으로 발전되어 일
본, 독일 등 선진국의 제네랄후드 계열 회사에서도 견학 왔다, 일본, 미국, 러시아, 
독일 등 각국에 프리마, 커피의 수출도 성공했다.

▲ 조필제 회장은 자서전과 평생 쓴 글, 강연기록을 별책으로 발간하려고 중비 중이
다.<사진=김지영 기자> 
동서식품을 마지막으로 생산회사 경영에서 퇴직한 그는 부동산 관련 일을 하는 세양
주택을 창업했으며, 인재양성을 위해 고향 함안군 장학재단과 모교인 서울대학 장학
대단을 통해 꾸준히 장학금을 수여하고 있다. 또 함안의 많은 선대 유적을 자비로 수
축, 복원하는 등 제2인생을 살고 있다.
최근에는 자서전 초안을 완성했으며, 평생 쓴 글과 강연기록도 별책으로 발간하려고 
준비 중이다. 그야말로 퇴직 후가 더 바쁘고 즐거운 인생이다.
"할아버지께서 남기신 유언이 있다. ▲교육 사업을 해 줄 것 ▲유적을 보존해 줄 것 
▲ 가난한 사람을 위해 도와줄 것 등이다. 함안은 고향이기보다 여러 조상들이 유적
을 남긴 곳이다. 오늘이 있기에 조상들에게 감사하며, 많은 사람들에게 베푸는 삶을 
살고자 한다."
조 회장의 조부는 생전에 재산을 분활해 조상 유적 보존과 각종 제례 등 승조목적으
로 120석, 서당(임파정)을 지어서 二十명서생(유학)교육 (숙식제공)에 120석, 기타 
어려운 사람 도움에 120석으로 기금을 만들어 시행했다. 이를 계속 하라는 유훈을 가
훈으로 남기셨으나, 조부의 작고 후 우리나라가 해방되고 농업 토지 개혁이 이루어지
고, 6.25사변으로 임파정도 소실되어 현재는 유업계승을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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